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가네코 후미코 일본에 저항하고 박열을 사랑한 아나키스트

by ㅁㅜㅅㅣㄱㅈㅐㅇㅣ 2022. 3. 15.
반응형

가네코 후미코 박열과 함게 아나키스트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하고 자유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관동대지진이 후 연행되어 일왕 암살의 죄명으로 사형을 판결받았다. 박열과는 옥중 결혼을 하였으며, 박열의 민족주의와 조선독립운동에 일조하게 된다.

가네코 후미코
일본에 저항하고 박열을 사랑한 아나키스트

박열이란 영화 개봉 후 주목받는 일본인 여인이 있다.

카네코 후미코이다.

한국 이름은 박문자.

박열이 기고한 시 한편으로 시작으로 그녀는 박열과 함께 했고 자유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박열과 그녀의 운동 후 일본의 재판정을 뒤흔들었다.

일왕의 암살 작전을 빌미로 세계에 조선의 상황을 알렸고
일본 내각은 사퇴에 이르기도 했다.

일생

그녀는 어릴 때 조선에서 생활했고, 1919년 일본으로 떠났다.

조선에 있던 친척집에서 식모생활을 하며 조선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는데 1919년 조선의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게 된다.

일제에 핍박받던 조선인들에게 멸시를 받는 동시에 만세운동을 본 직후 그녀의 사상에 변화가 생겼다고 전해진다.

만세운동이 벌어진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보급소에서 일하게 되는데
이 때 박열의 시 한편을 보게 된다.

이후 그녀는 박열과 함께 하게 되며 불령사란 단체를 조직한다.

불령사는 일본인과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자유주의 운동의 아나키스트 단체이다.

일본에서의 재판

아나키스트로써 자유주의운동을 하던 그 때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발생한다.

관동대지진은 진도 7.9의 강진으로 현재 일본의 도쿄를 포함한 미나미칸토 지방을 초토화하게 되며,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 14만명, 이재민 340만명이 발생한 당시 일본에서는 대재앙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알고 있듯이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덩달아 죄없는 일본인도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카네코 후미코와 박열은 일제에 잡혀 구속된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박열과 함께 가네코 후미코 또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선고 직후 만세를 크게 외쳐 법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얼마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으며, 박열은 22년 뒤 석방되어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카네코 후미코는 옥중 사망한다.

가네코 후미코와 건국훈장

가네코 후미코의 묘지는 현재 경북 문경에 있다.

경북 문경은 가네코 후미코의 남편인 박열의 고향이기도 하다.

해방이후 가네코 후미코는 경북 문경의 묘지에 안장되었으나, 박열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북에서 사망하게 된다.

2018년 79회 순국선열의 날에 가네코 후미코는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으며, 박열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회원들은 일본과 우리나라를 번갈아 가며 추도식을 열고 있다.

반응형

댓글